유발 하라리 / 김명주 옮김


- 전례 없는 수준의 번영, 건강, 평화를 얻은 인류의 다음 목표는,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가치들을 고려할 때, 불멸, 행복, 신성이 될 것이다. 짐승 수준의 생존투쟁에서 인류를 건져올린 다음 할 일은 인류를 신으로 업그레이드하고,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데우스'로 바꾸는 것이다. 

- 불멸과 신성에 대한 꿈 앞에서 사람들이 당황하는 이유는 그것이 낯설고 불가능한 일처럼 들려서가 아니라,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일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생명, 행복, 힘을 신성시하고 얻으려는 시도는 인본주의(인류에 대한 숭배)가 품어온 오랜 이상의 논리적 결론일 뿐이다. 하지만 인본주의는 떠오를 때부터 몰락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인간을 신으로 업그레이드하려는 시도는 인본주의의 논리적 결론인 동시에 인본주의에 내재된 결함을 드러낸다. 

- 21세기의 인간은 불멸에 진지하게 도전할 것이다. 노화와 죽음과의 싸움은 인간이 그동안 해온 기아와 질병과의 싸움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고, 이 시대의 문화가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인간 생명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다. 그런데 죽음은 이 권리에 명백히 반하는 것이므로 인류에 대한 범죄이고, 따라서 우리는 죽음과 전면전을 치러야 마땅하다. 

- 역사를 통틀어 종교와 이념은 생명 그 자체를 신성시하지는 않았다. 종교와 이념은 언제나 세속적인 존재 위의 어떤 것, 또는 그런 존재를 초월한 뭔가를 신성시했고, 따라서 죽음에 꽤 관대했다. 현대의 과학과 문화는 삶과 죽음에 대해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한다. 이 둘은 죽음을 형이상학적 신비로 간주하지 않으며, 당연히 죽음에서 인생의 의미가 나온다고 보지도 않는다. 오히려 현대인에게 죽음은 해결할 수 있고 해결해야만 하는 기술적 문제이다. 과학자, 의사, 학자들 대부분은 불멸에 대한 노골적인 꿈과 거리를 둔 채, 자신들은 그저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 인류는 21세기의 두 번째 목표로 행복을 추구할 것이다. 심리적 수준에서 보면, 행복은 객관적 조건보다 기대치에 달려 있다. 생물학적인 수준에서 보면 기대와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아니라 우리의 생화학적 조건이다. 현재 인류는 생화학적 해법에 훨씬 더 관심이 많다. 

- 인간이 행복과 불멸을 추구한다는 것은 성능을 업그레이드해 신이 되겠다는 것이다. 인간이 노화와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생물학적 기질을 신처럼 제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신으로 업그레이드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생명공학, 사이보그 공학, 그리고 비유기체 합성이다. 

-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쉬웠던 적은 없지만, 생명공학 혁명은 그 일을 더 어렵게 만든다. 수천 년 역사에서 딱 하나의 상수는 인류 그 자체였다. 그러나 우리가 신기술로 인간의 마음을 재설계할 수 있을 때 호모 사피엔스는 사라질 것이다. 가치 있는 예측은 인간의 마음을 재설계할 수 있는 능력을 반드시 고려해야만 하는데, 이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와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생명공학으로 무엇을 할까?'라는 질문에는 여러 가지 현명한 대답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와 전혀 다른 종류의 마음을 지닌 존재가 생명공학으로 무엇을 할까?'라는 질문에는 쓸 만한 대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 우리가 거대한 미지의 세계로 빠르게 돌진하고 있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 죽음 뒤에 숨을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반응은 누군가가 브레이크를 밟아 그 속도를 늦춰줄 거라는 바람이다. 그러나 브레이크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또한, 만일 어떻게든 브레이크를 밟는다면, 경제가 무너지고 그와 함께 사회도 무너질 것이다. 

- 역사 지식의 역설: 행동을 바꾸지 못하는 지식은 무용지물이다. 이 책 곳곳에 등장하는 예측들은 모두 현재의 딜레마에 대해 논의해보자는 시도이며, 미래를 바꿔보자는 제안일 뿐이다. 

- 인본주의는 세계를 정복했지만, 떠오를 때부터 몰락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 역사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위대한 상수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다. 

- 솔직히 마음과 의식에 관해 과학이 아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적다. 오늘날 정설은 뇌의 전기화학적 반응에 의해 의식이 생기고, 마음의 경험들은 어떤 필수적인 데이터 처리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뇌에서 일어나는 일군의 생화학적 반응과 전류가 어떻게 고통이나 분노, 또는 주관적 경험을 만들어내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 어떤 실체가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할 때 우리가 주로 찾는 특징은 수학적 소질도, 좋은 기억력도 아니다. 그 실체가 우리와 정서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 우리가 '상상의 질서'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두 가지 유형의 실재만 존재한다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실재 말이다. 객관적 실재에서는 모든 것이 우리의 믿음이나 느낌과 관계없이 존재한다. 반면 주관적 실재는 내 개인적 믿음과 느낌에 의존한다. 그러나 실재에는 제 3의 층위가 존재한다. 그것은 상호주관적 실재이다. 

- 사피엔스는 삼중현실을 살아간다. 객관적 실재, 주관적 경험 이외에 이야기들을 포함한다. 

- 근대 과학은 이전의 신화와 달리 확실히 객관적인 사실을 밝혀내어 게임의 룰을 바꾸었지만, 그렇다고 신화를 사실로 대체한 것은 아니다. 신화는 계속 인류를 지배하고 있고, 과학은 그런 신화를 더 강화할 뿐이다. 과학은 상호주관적 실재를 파괴하기는커녕, 상호주관적 실재가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실재를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하게 통제하게 할 것이다. 컴퓨터와 생명공학 덕분에 허구와 실제의 차이가 모호해질 것이고,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허구에 맞게 실제를 바꿀 것이다. 

- 샘 해리스 같은 몇몇 철학자들은, 인간의 가치 안에는 언제나 사실적 진술이 감춰져 있으므로 과학이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해리스는 모든 인간이 단 하나의 지고의 가치(고통 최소화+행복 극대화)를 공유하고, 그러므로 모든 윤리적 논쟁은 행복을 최대화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에 관한 사실적 논증들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해리스가 옳다고 해도 현실에서 이런 통찰을 이용해 윤리적 논쟁을 해결하기는 매우 어렵다. 무엇보다 우리는 행복에 대한 과학적 정의나 척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령 과학이 윤리적 논쟁에 기여하는 몫이 생각보다 크다고 해도, 적어도 아직까지는 넘을 수 없는 선이 존재한다. 어떤 종교의 인도하는 손 없이 대규모 사회질서를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종교는 과학 연구에 윤리적 정당성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과학 의제와 과학 발견의 용도에 영향을 미칠 기회를 얻는다. 

- 근대사를 과학과 특정 종교, 즉 인본주의 사의의 계약 과정으로 보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한 관점일 것이다. 근대 이후의 사회는 인본주의 교의를 믿고, 그 교의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교의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과학을 이용한다. 

- 근대성은 일종의 놀랍도록 간단한 계약이다. 인간은 힘을 가지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는 데 동의한다는 것이다. 실질적인 견지에서 보면, 근대 이후의 삶은 의미가 사라져버린 우주 안에서 끊임없이 힘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 성장에 대한 집착은 자명한 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현대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종교라 불러도 틀리지 않은 것은, 우리가 당면한 윤리적 딜레마의 많은 부분을 경제성장이 해결해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의 손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볼 수도 없어서 혼자서는 절대 인간사회를 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판매대상이라면, 신뢰는 증발하고 신용은 사라지고 사업은 망할 것이다. 근대사회를 붕괴에서 구한 것은 수요공급의 법칙이 아니라, 새롭게 떠오른 혁명적인 종교인 인본주의였다. 

- 인본주의 윤리에서 가장 흥미로운 논의는 인간의 감정이 충돌하는 상황에 대한 것이다. 인본주의는 어떤 일이 누군가에게 나쁜 감정을 일으킬 경우에만 나쁘다고 가르쳐왔다. 살인이 나쁜 것은 신이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가족, 친구, 지인들에게 끔찍한 고통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어떤 행동이 어느 누구의 기분도 상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 행동은 문제될 것이 없다.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의 감정이 예술 창조와 미적 가치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인본주의적 접근방식은 경제 분야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람이 그 회사의 제품을 좋아한다면, 그 회사가 '선의의 힘'임을 암시한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 회사의 제품을 자유의지로 선택한다면, 당신이 뭔데 그들에게 틀렸다고 말하겠는가? 마지막으로, 인본주의 사상이 부상하면서 교육제도도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현대의 인본주의 교육은 학생들에게 스스로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 인본주의는 과학혁명이 제안한 '지식 = 경험적 데이터 X 수학'의 공식을 '지식 = 경험 X 감수성'으로 바꾸었다. '경험'이란 무엇일까? 경험은 감각, 감정, 생각으로 이루어진 주관적 현상이다. 그렇다면 '감수성'은 무엇일까? 첫째는 감각, 감정, 생각에 주목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 감각, 감정, 생각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인본주의는 그리스도교, 불교와 같은 모든 성공한 종교와 같은 길을 걸었다. 인본주의 역시 확산되고 진화하면서 서로 충돌하는 여러 분파로 쪼개졌다. 인본주의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우선 정통파는 인간은 저마다 독자적인 내적 목소리와 재생 불가능한 일련의 경험을 소유하는 유일무이한 개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모든 개인에게 세계를 경험하고,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고, 본인의 진면목을 표현할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게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자유 인본주의' 또는 간단히 '자유주의'라고 부른다. 19세기와 20세기에 이르러 서로 매우 다른 두 분파가 생겨났다. 사회주의적 인본주의와 진화론적 인본주의이다. 이 둘은 자유주의가 인간의 경험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결함이 있다고 지적했다. 만일 모든 권위와 의미가 개인의 경험에서 나온다면, 각기 다른 경험들 사이의 충돌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 자유주의는 많은 경우 오래된 집단 정체성 및 동족의식과 융합해 근대 민족주의를 형성했다. 공동 경험의 가치와 개인 경험의 가치를 어떻게 비교할까?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매우 다른 경로를 밟았다. 사회주의는 나와 내 감정에 집착하는 것을 멈추고 타인들이 어떻게 느끼고 내 행동이 그들의 경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심을 둘 것을 요구한다.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갈등은 한탄할 일이 아니라 박수 칠 일이라고 주장한다.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고, 다라서 인간의 경험들이 서로 충돌할 때는 최적자가 다른 모든 이를 누른다. 나치가 대표적인 진화론적 인본주의의 신봉자이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는 인류의 지평을 모조리 가리는 검은 커튼이 아니라, 피로 물든 붉은 경고등이 되어야 한다.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근대 문화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21세기의 형성에는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다. 

- 자유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과오를 범할까봐 문화 비교라는 지뢰밭을 조심스레 우회하고, 사회주의자들은 이 지뢰밭을 통과하는 옳은 길을 찾는 문제를 당에 떠넘기는 반면, 진화론적 인본주의자들은 그 안으로 신나게 뛰어들어 모든 지뢰를 터뜨리고 대혼란을 즐긴다.

- 현재 개인주의, 인권, 민주주의, 자유시장이라는 자유주의 패키지를 대신할 이렇다 할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21세기 초, 진보의 열차가 다시 정거장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좌석을 얻기 위해 당신은 21세기의 기술을 이해해야 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생명공학과 컴퓨터 알고리즘의 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 만일 고객과 유권자가 실은 자유의지로 선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는 순간,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감정을 계산하고 설계하고 훤히 꿰뚫는 기술을 가지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날까? 만일 우주 전체가 인간 경험에 묶여 있는데, 인간 경험이 설계 가능한 제품이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 21세기 과학이 자유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과학은 가치의 문제를 다루지 않으므로, 자유주의자들이 평등보다 자유에 더 가치를 두고 집단보다 개인에 더 가치를 두는 것이 옳은지 판단할 수 없다. 그렇지만 다른 모든 종교처럼 자유주의도 추상적인 윤리적 판단만이 아니라 사실적 진술을 기반으로 하는데, 이런 사실적 진술들은 엄밀한 과학적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다. 

-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윤리적 판단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사실적 진술이다. 사실적 진술이었다. 이 사실적 기술은 생명과학의 최신 연구결과들과는 잘 맞지 않는다. 지난 세기 과학자들은 사피엔스의 블랙박스를 열어 그 안에 영혼, 자유의지, '자아'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뇌의 전기화학적 과정들은 결정론적이거나 무작위적이거나 둘 다이다. 하지만 자유의지를 다르지는 않는다. 예컨대 뉴런 하나가 발화해 전하를 내보낼 때, 그것은 외부자극에 대한 결정론적 반응이거나 아니면 방사성 원자의 자발적 붕괴 같은 무작위적 사건의 결과일 것이다. '자유'라는 신성한 단어는 알고 보니 '영혼'과 마찬가지로 의미를 밝히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알맹이 없는 용어였다. 자유의지는 앞으로 우리 인간이 지어낸 상상의 이야기 속에만 존재할 것이다. 자유를 관 속에 넣고 못을 박은 것은 진화론이다. 진화론에 따르면 동물들이 하는 모든 선택은 그들의 유전암호를 반영한다. 나는 내 욕망을 선택하지 않는다. 단지 그 욕망을 느끼고 그것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 '경험하는 자아'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을 끄집어내고 이야기를 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모두 우리 안에 있는 매우 다른 실체인 '이야기하는 자아'의 독단이다. 이 둘은 별개의 실체가 아니라 긴밀하게 얽혀 있다. 이야기하는 자아는 경험을 이야기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재료로 이용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은 다시 경험하는 자아가 실제로 느끼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 

- 이야기하는 자아 역시 국가, 신, 돈과 마찬가지로 상상 속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우리들 각자는 저마다 이야기를 지어내는 정교한 장치를 갖고 있는데, 그 장치는 경험의 대부분을 버리고, 고르고 고른 몇 가지 표본만 간직한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본 영화, 우리가 읽은 소설, 우리가 들은 연설, 우리가 음미한 몽상의 파편들과 뒤섞는다. 그런 다음 그 뒤범벅 속에서 내가 누구이고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일관되어 보이는 이야기를 짜낸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사랑하고 누구를 증오하고 무엇을 할지 알려준다. 심지어 이 이야기는 줄거리에 필요하다면 내 목숨까지 희생시킨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이야기일 뿐이다.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야기하는 자아가 부여한 질서일 뿐이다. 

- 세 번째 천년의 초입에 자유주의가 직면한 위협은 '자유의지를 지닌 개인 따위는 없다'는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 기술들이다. 머지않아 우리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 엄청나게 유용한 장치들, 도구들, 구조들의 홍수에 직면할 것이다. 민주주의, 자유시장, 인권이 과연 이 홍수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 21세기에 전개될 세 가지 실질적 상황이 자유주의자들의 믿음을 무용지물로 만들 것이다. 1) 인간은 경제적, 군사적 쓸모를 잃을 것이고, 따라서 경제적, 정치적 시스템은 그들에게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2) 시스템은 인간에게서 집단으로서의 가치는 여전히 발견할 테지만, 개인으로서의 가치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3) 시스템은 일부 특별한 개인들에게서 가치를 발견할 테지만, 그런 개인들은 일반 대중이 아니라 업그레이드된 초인간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엘리트 집단일 것이다. 

- 자유주의가 지배적 이념이 된 것은 그 철학적 논증이 한치의 오류도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자유주의가 성공한 것은 모든 인간존재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타당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언제까지나 비의식적 알고리즘의 능력을 뛰어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질 거라는 생각은 희망적 사고에 불과하다. 사실 시간이 갈수록 인간을 컴퓨터 알고리즘으로 대체하기가 점점 더 쉬워지는데, 알고리즘이 더 영리해지고 있기도 하지만, 인간이 전문화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뭘 할 수 있을까? 쓸모없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시간을 가상현실에서 보낼 것이고, 몰입하고 만족하게 될 것이다. 그런 상황은 인간의 생명과 경험이 신성하다고 믿는 자유주의적 신념에 치명타를 가할 것이다. 

- 21세기의 신기술들은 인간에게서 권한을 박탈하고 비인간 알고리즘들의 권한을 강화할 것이다. 이미 수백만 명이 이미 이런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 중 다수가 사생활과 개별성을 포기하고,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온라인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네트워크 연결이 몇 분이라도 끊기면 히스테리를 부린다. 인간이 집단으로서의 가치는 유지하더라도 개인은 권위를 잃고 외부 알고리즘의 관리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 자유주의가 직면한 세 번째 위협은, 일부 사람들은 업그레이드되어 필수불가결한 동시에 해독 불가능한 존재로 남아 소규모 특권집단을 이룰 거라는 점이다. 

-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가장 흥미로운 곳은 실리콘밸리이다. 신흥 기술종교들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는데, 기술 인본주의와 데이터 종교이다. 

- 기술 인본주의는 인간을 여전히 창조의 정점으로 보고, 전통적인 인본주의의 여러 가치들을 고수한다. 우리가 아는 형태의 호모 사피엔스는 역사의 행로를 완주했으며 미래에는 할 일이 없다는 데 동의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술을 이요해 호모 데우스를 창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사실 기술 인본주의는 결국 인간을 다운그레이드할 것이다. 두 번째 인지혁명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 효과적으로 데이터를 전달하고 처리할 수 있지만 집중하고 꿈꾸고 의심하지 못하는 인간 톱니를 생산할 것이다. 수백만년 동안 성능이 향상된 침팬치로 살았던 우리는 특대형 개미가 될지도 모른다. 또한, 기술 인본주의는 해결이 불가능한 딜레마에 봉착한다. 인본주의는 인간의 의지를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므로, 의지를 제어하고 재설계할 수 있는 기술을 어서 개발하라고 우리를 독촉한다. 하지만 막상 그런 통제력을 갖게 되면 기술 인본주의는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 알지 못할 것이다.

- 따라서 더 과감한 기술 종교인 데이터교는 인본주의의 탯줄을 아예 끊으려 한다. 데이터교는 우주가 데이터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현상이나 실제의 가치는 데이터 처리에 기여하는 바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한다. 비주류 개념 같다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이 개념은 이미 과학계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데이터교는 두 모태 학문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는데, 바로 컴퓨터 과학과 생물학이다. 둘 중 생물학이 더 중요하다.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며 기린, 토마토, 인간이 단지 데이터를 처리하는 각기 다른 방법에 불과하다는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현시점의 과학적 정설이며 우리 세계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데이터교에 따르면, 인간의 경험은 신성하지 않고 호모 사피엔스는 창조의 정점도 호모 데우스의 전구체도 아니다. 인간은 그저 만물인터넷을 창조하는 도구이며, 만물인터넷은 결국 우주 전체로까지 확장될 것이다. 우리가 경험을 분주하게 데이터로 전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추세의 문제가 아니고 생존의 문제이다. 우리는 자신이 여전히 가치 있다는 것을 자기 자신과 시스템에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가치는 경험을 하는 데 있지 않고, 경험들을 자유롭게 흐르는 데이터로 전환하는 데 있다. 

- 데이터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란 종은 단일한 데이터 처리 시스템이고, 개인은 시스템을 이루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 전체를 이 시스템의 효율을 높이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 과정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방법으로 진행된다. 1) 프로세서의 수를 늘린다. (도시 > 시골) 2) 프로세서의 다양성을 늘린다. (다양한 직군) 3) 프로세서들 간의 연결을 늘린다. 4) 현존하는 연결을 따라 이동할 자유를 늘린다. 

- 데이터교는 자유주의적이지도, 인본주의적이지도 않지만, 적어도 반인본주의적이지는 않다. 데이터교는 인간의 경험 자체에 반감을 갖지 않는다. 다만, 경험 자체에 가치가 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뿐이다. 경험은 더 우월한 알고리즘에 의해 처리되는 데이터일 뿐이다. 그런데 이 우월한 알고리즘은 어디서 올까? 그것이 데이터교의 미스테리이다. 생명과학과 사회과학 분야의 학자들은 우리가 생명을 데이터 처리와 의사결정 과정으로 이해할 때 놓치는 것이 없는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우주에는 데이터로 환원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 실제로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기술이 결정론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이 현시점에 우리가 처한 조건화의 기원을 추적하는 것은 그 얽매임에서 벗어나 다르게 행동하고, 미래에 대해 훨씬 더 창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기 위해서이다. 이 책의 목표는 단 하나의 결정적인 시나리오를 예측하는 대신, 지평을 넓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의 스펙트럼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 우리가 생명이라는 실로 장대한 관점으로 본다면, 상호 관련된 다음의 세 과정 앞에서 다른 모든 문제와 상황들은 작게 보일 것이다. 1) 과학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의 교의로 수렴하고 있고, 이 교의에 따르면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며 생명은 데이터 처리 과정이다. 2) 지능이 의식에서 분리되고 있다. 3)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들이 곧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 그리고 이 세 과정은 세 가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1) 유기체는 단지 알고리즘이고, 생명은 실제로 데이터 처리 과정에 불과할까?
2) 지능과 의식 중에 무엇이 더 가치 있을까?
3)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이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면 사회, 정치, 일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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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는 사피엔스에서 내가 저자와 충돌했던 지점인 "보편타당한 가치"에 대해 한층 적극적으로 논하는 책이었다. 


어릴 적 사랑으로 키워주신 할머니와의 관계 덕분에, 또한 타고난 것 같은 추상에 대한 감수성 덕분에 난 한동안 기독교를 모태신앙으로 여겨왔다. 더욱이 미성년자 땐 아버지의 적극적인 반대로 교회에 나가지 못하는 일종의 죄책감까지 안고 지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신앙에 대한 당위성은 꾸준히 의구심을 불러왔다. 상식과 상충하는 표면적인 성경 구절의 해석은 종교의 심오함 뒤에 대충 숨기더라도, 핵심적인 주요 개념들을 삶의 이정표로 믿고 따를 수 있는지 확신이 필요했다. 때문에, 운신의 자유가 생긴 대학교 생활 초반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성경공부를 하러 다니곤 했다. 이어져 온 기간이나 성공으로 볼 때 기독교의 역사나 양상이야 한없이 넓고 깊을 테니 내가 그 전반을 아우를 수 있는 공부를 했다고는 보기 어렵지만, 내게 필요한 건 단순했다. 유일신이 존재하고, 그 존재가 하나님이며, 성경이 그의 말씀을 담았는가? "확신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고, 그렇게 나는 소위 실족했다. 


이후의 가치 추구는 하라리가 묘사하는 인본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든 출발은 나와 내 감정을 포함한 경험이었고, 나의 존재, 더 정확히는 내 의식의 존재 자체로 당위성이란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를 관계로 확장하기 위해서 모든 존재하는 인간들은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는 글로벌 룰을 하나 받아들였고, 이와 상충하는 새로운 글로벌 룰의 생성은 극도로 경계하면서도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경험의 간극을 해결하기 위해 유한한 수의 집단 내에서 상호주관적으로 정의되면서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로컬 룰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치 판단은 언제나 두 단계로 이루어졌는데, 상당히 보수적으로 글로벌 룰에 위반되는지를 검토하는 과정과, 로컬 룰에 내 자의식이 주도적으로 기여할 기회를 찾는 과정이 그것이었다. 즉, 내 존재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모두를 마땅히 설득할 수 있어 보이는 주장으로 그 의미를 확장한 뒤, 그걸 바탕으로 직접 교류하는 사회 내에서 다양한 형태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내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는 형태의 과정들이었다. 

이제껏 오래 변하지 않고 가져왔던 내 가치관들은 다 이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아이를 꼭 갖고 싶어 했던 것도 새로운 존재를 낳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수학에서 출발해 복잡계에 이르기까지 전공 분야를 선택해 온 과정도 내 판단을 과학적으로 설명해보기 위함이었으며, 갈등 상황에 개입하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했던 것도 저 구도를 통해 남다른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외모에 대한 글로벌한 기준이 있다는 것을 거부한 것, 남자 친구와 여자 친구를 대하는 차이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던 것, 소위 위아래 없이 행동하려고 했던 것, 일관성을 정치인의 가장 큰 재능으로 생각한 것, 누가 어쨌다더라는 엄마의 말을 삶에 반영하지 않은 것 등등이 모두 결을 함께 한다. 한동안은 이 시각으로, 확신에 차서 삶을 살아왔다. 


다만, 최근 몇 년의 경험은 이런 사고 체계에 대한 상당한 변화를 요구했고, 이로 인해 지금의 나는 해결되지 않은 고민을 안고 있다. 

우선, 존재에 꼭 의미 부여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라는 점은 시작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과학적인 근거들이 업데이트되며 환기시켜 주는 부분도 있었지만, 이건 논리적으로도 자명했다. 다만, 내 판단의 객관적 실재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주관적 세계에서 나는 매 순간 판단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데, 삶에 의미를 부여해 가치관을 갖지 않고는 허무주의로 빠지지 않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의미를 부여했던 일들에서 실패를 겪으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가장 단적인 예는 최근의 이별이다. 위에서 이어지는 가치관의 관점으로 본다면, 주도적으로 개입해 만들어 놓았던 수많은 가치관들 대신 새로운 로컬 룰을 함께 만들면서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의 세계를 위한 스토리텔링을 시도했지만, 결국 설득력을 갖지 못하고 실패해버린 것이다. 연속적인 몸의 슬럼프도 유사한 실패의 경험이다. 판단한 우선순위가 맞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왔는데, 좀처럼 상황이 나아지질 않는다. 이런 실패의 경험이 내 사고방식의 논리적 정합성 자체를 훼손하는 건 아니었지만, 가치 판단 과정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하라리가 기술한 것처럼 과학기술의 발전 역시 사고 체계에 상당한 변화를 요구했다. 갑론을박이 있는 미래의 기술 발전 정도에 대한 정확한 예측은 차치하더라도, 이미 제기된 몇몇 존재론적 질문들에 대해서 유연한 로컬룰로만 커버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있다. 현재로선 소위 과학기술인으로서 기술인본주의와 데이터교로 기술된 호모 데우스의 세계관을 거부할 근거를 생각하기 어렵고, 내 기존의 사고 체계가 자연스럽게 확장될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다. 

몇 달간 반복해서 말한 것 같은데, 지금으로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말 잘 모르겠다. 관성대로 기존의 사고 체계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긴 한데, 이미 큰 의구심이 들어버렸으니..


여튼, 사피엔스에서는 나와 비슷한 세계관을 여러 군데 발견하면서도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즐거움을 느꼈다면, 호모 데우스는 사피엔스에서 얻은 새로운 시각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제공받으면서도 어릴 적의 가치관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최근의 개인적인 고민들까지 이어지는 질문들을 받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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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 / 조현욱 옮김


- 별 볼일 없었던 인류는 인지혁명 이후 픽션을 창조하는 능력 덕분에 생물학적 영역의 구속 내에서 행동과 능력의 한계를 극도로 넓힐 수 있었다. 

- 농업혁명 이후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식량의 총량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인구 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낳았다.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며,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 상상의 질서는 물질 세계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고, 우리 욕망의 형태를 결정하며, 상호주관적으로 존재한다. 

- 수천년의 관점에서 보면, 인류가 통일을 향해 가고 있다는 점은 명약관화하다. 우리는 여전히 '고유'문화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지만, '고유성'이라는 것이 독자적으로 발달된 무엇,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대의 지역전통으로 구성된 것을 뜻한다면, 오늘날 지구상에는 고유 문화가 하나도 없다. 

- '우리 대 그들'이라는 이분법적 진화적 구분을 넘어서기 위해 등장한 질서는 화폐 질서, 제국의 질서, 종교의 질서 등이 있었다. 

- 역사는 결정론으로 설명될 수도 예측될 수도 없다. 역사는 카오스적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시장이나 정치는 second order chaotic system(예측에 대해 반응 하는 카오스)이다. 그렇다면 왜 역사를 연구하는가? 역사는 정확한 예측을 하는 수단이 아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다. 우리의 현재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 현대 과학은 과거의 모든 전통 지식과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1) 무지를 기꺼이 인정하는 용의가 있다. 라틴어로 표현하면 ignoramus에 기반을 두고 있다. 2) 관찰과 수학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3) 이론을 창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용해서 새 힘을 획득하고자 한다. 

- 하지만 현대과학은 선조들이 대처할 필요 없었던 심각한 문제를 하나 제기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지 못하며 지금의 지식도 잠정적인 것이라는 가정은 우리가 공유하는 신화에까지 적용된다. 이 신화들 중 많은 것이 의심스럽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우리는 어떻게 사회를 유지할 수 있을까? 우리의 공동체, 국가, 국제 시스템은 어떻게 기능할 수 있을까? 정치사회적 질서를 안정시키려는 현대의 모든 노력은 다음의 두가지 비과학적 방법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1) 하나의 과학이론을 택해서 통상의 과학적 관례와는 반대로 그것이 궁극적인 절대진리라고 선포하는 것. 2) 과학은 내버려두고 과학과 무관한 절대진리에 따라 사는 것. 이것은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전략이었다. 

- 현대 경제가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미래를 신뢰하는 덕분이며, 자본주의자들이 이윤을 생산에 재투자할 의사가 충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장에 필요한 에너지와 원자재는 유한하고, 이들이 고갈된다면 성장에 대한 믿음은 깨질 것이다. 이들은 정말 유한할까? 산업혁명의 핵심은 에너지 전환의 혁명이었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에는 한계가 없고 유일한 한계는 우리의 무지뿐이라는 사실을 산업혁명은 되풀이해서 보여주었다. 

- 인류로 인한 생태계 파괴는 자원 희소성과 같은 문제가 아니다.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은 계속해서 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 추세는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이와 반대로 생태계 파괴에 대한 두려움은 근거가 너무 확실하다. 

- 현대사회의 속성을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카멜레온의 색을 규정하려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속성은 끊임없는 변화다. 

- 행복에 대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의는 '주관적 안녕'이다. 즉, 내 삶이 진행되는 방식에 대해 느끼는 즉각적인 기쁜 감정이나 장기적인 만족감이다.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 원하는 것을 더 많이 가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의 내부 생화학 시스템은 행복 수준을 상대적으로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는 듯 하다. 진화에서 행복과 불행이 맡는 역할은 생존과 번식을 부추기거나 그만두게 하는 것과 관련해서만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진화의 결과 우리가 너무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행복이란 불쾌한 순간을 상쇄하고 남는 여분의 즐거움의 총합이 아니라, 그보다는 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데서 온다는 것이다. 행복에는 중요한 인지적, 윤리적 요소가 존재한다. 우리가 아는 한, 순수한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은 절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류는 목적이나 의도 같은 것 없이 진행되는 눈먼 진화과정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가치는 그것이 무엇이든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행복의 관건은 의미에 대한 개인의 환상을 폭넓게 퍼진 집단적 환상에 맞추는 데 있을지 모른다. 내 개인적 내러티브가 주변 사람들의 내러티브와 일치하는 한 나는 내 삶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으며, 그 확신을 통해 행복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앞 두 가지의 주관적 요소가 전부일까? 불교에서는 진정한 행복은 주관적 느낌이나 감정과도 무관하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외적 성취의 추구뿐 아니라 내 내면의 느낌에 대한 추구 역시 중단하는 것이다. 

- 대부분의 역사서는 사회적 구조, 제국의 흥망, 기술의 발견과 확산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개인들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 이해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공백이다. 

- 지난 수십억 년 동안 생명의 역사에서 지적설계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 생명공학, 사이보그 공학, 비유기물공학을 통해 지적인 설계가 지배하는 우주적인 새 시대가 열리려 하고 있다. 만일 사피엔스의 역사가 정말 막을 내릴 참이라면, 우리는 그 마지막 세대로서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의 질문에 답하는 데 남은 시간의 일부를 바쳐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우리는 머지않아 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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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즐거운 경험이었다. 말이 잘 통하는 박식한 친구와 대화하는 느낌, 더욱이 그 친구가 내 생각을 지지하는데다 지평을 넓혀주는 느낌까지 들게 하는 독서라니.

사회의 질서를 부여하는 도덕과 정의, 종교, 국가, 화폐 등의 관념이 상호주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관점, 그리고 그런 관념들이 욕망의 형태까지 결정한다는 주장, 주관적 안녕이란 정의에서 출발해 나와 주변의 내러티브를 일치시키는 지점을 지나 주관의 영역을 넘어서는 개념으로 행복을 기술하는 것 까지 마치 내 생각을 그대로 적어 놓은 것 같았다. 게다가 현대 과학의 특징을 설명하는 부분이나, (second order) chaotic system인 사회에서 과거를 통한 미래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점에 대한 인식, 현대 경제 시스템의 작동 메카니즘을 설명하는 부분, 현대 사회의 속성을 언급하는 부분 등도 내가 전공으로 삼고 공부해왔던 관점들과 일치해서 너무 반가웠다.

뿐만 아니라, 농업혁명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자원 고갈에 대한 해석, 역사서의 지향점에 대한 설명 등은 내가 접해보지 못한 신선한 것들이었다.

충돌이 있었던 지점은 한 곳이었다. 사회 관념이 상호주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일치했지만, 나는 그 가운데에서도 적은 수의 '보편타당한 가치'(e.g. 생명의 존엄성)가 존재할 거라고 생각해온 반면, 저자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의 예를 통해 이런 '가치'들이 인간에게 비과학적으로 질서를 부여하는 하나의 형태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과학적인 관점 하에서는 납득할만하다고 느껴지고, 개인적으로는 좀 더 생각해볼 만한 문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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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quantamagazine.org/teenager-finds-classical-alternative-to-quantum-recommendation-algorithm-20180731/


양자컴퓨터에서만 가능할 것 같았던 추천 알고리즘 속도 개선을 현재의 컴퓨터로도 구현할 수 있다는 논문이 나온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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